랍비 예수(로이스 티어베르그)

이스라엘 아카데미
2022-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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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 본문이 갑자기  살아 움직이고, 

우리를 헷갈리게 한 구절이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이 책을 읽은 후에는 전과 동일한 태도로 성경을 대할 수 없다. 

2차원 평면에 갇혀 있던 말씀이 입체적으로 튀어나와 

우리에게 말을 걸기 때문이다.

랍비 예수 책 날개 중




새로운 귀로 랍비의 말씀을 듣다


# 우리에게 파격 그 자체인 예수님의 말씀이 1세기 제자들의 귀에는 어떻게 들렸을까? 처음 든 생각은 "정말 유대인의 입맛에 딱 맞네!"였을 것이다. 으뜸 되는 계명과 관련해서 예수님은 유대 신앙의 핵심을 천명한 쉐마로 말씀을 시작한다. 유대인은 2천 년 넘게 매일 아침저녁으로 쉐마를 낭송하면서 오직 한 분 하나님을 온 마음과 힘과 정성을 다해 사랑하기로 다짐했다. 예수님이 쓰신 언어와 그분이 성경을 대하는 방식, 그리고 유대 민족에 관해 배우면 배울수록 우리는 예수님이 남기신 소중한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만일 우리가 세월이 먼지와 묵은 때를 벗겨 내고 복음서 안에 담긴 본래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어떤 일이 펼쳐질까? 예수님 주변의 풍경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면, 그리하여 그분이 거니셨던 원 맥락 속에서 다시 한번 주님을 시각화할 수 있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불변하지만, 그 말씀을 본래의 정황 속으로 가져가 이해한다면 훨씬 풍성한 의미를 건져 올리게 될 것이다. 랍비나 회당, 유목민, 농부, 왕, 양치기가 함께 살아가는 당시 세계는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너무도 이질적으로 다가온다. 그 흐릿한 배경의 초점을 제대로 찾는다면 우린 새로운 선명함으로 예수님을 조망할 수 있다.


# 복음이 전 세계로 확산하며 사람들은 자동으로 자신의 고유한 문화적 렌즈를 통해 예수의 모습을 그려나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도 마찬가지란 걸 알면 놀랄 것이다. 이 대작은 운명적 마지막 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상상력에 독보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 보자면 문화적 오류투성이다. 유월절 식사는 늘 밤에 했는데, 배경의 창밖 풍경은 대낮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얼굴은 셈족이 아닌 창백한 유럽인의 얼굴이라는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많은 오류는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에 있다. 양고기와 무교병 등 유월절을 기념하는 데 필수적인 음식들이 빠져 있다. 그 대신 발효된 음식을 엄격하게 금지하는 유월절 기간에 부푼 빵 덩어리가 있고, 충격적이리만치 '정결하지' 않은 오렌지 조각 고명을 얹은 장어구이 한 접시가 놓여 있다. 물론 다빈치의 목표는 결정적인 순간에 포착한 제작들의 반응을 묘사하는 것이었고, 천재적 기술과 심오한 표현력으로 그 일을 해냈다. 그러나 다빈치는 하나님의 구속을 기념하며 메시아에 대한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던 유월절 절기의 기본 요소를 빠뜨렸다. 사실 예수님은 유월절 상징을 사용하여 자신이 곧 믿는 자들을 속량하기 위하 속죄제가 되실 것이며 죄 사함의 '새 언약'이 시작되었음을 알리신다. 이 그림만 본다면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오랜 약속의 성취하고 강력하게 선포하셨음을 놓치기 쉽다.


#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헌신을 스스로 상기하기 위하여 날마다 두 번씩 이 여섯 단어 쉐마 이스라엘 아도나이 엘로헤이누 아도나이 에하드, 들으라, 이스라엘아, 우리 하나님 하쉠은 한분이시다. 로 시작되는 성경의 세 단락, 쉐마를 반복한다. 수천 년에 걸쳐 경건한 유대인 부모는 아이들이 말을 하자마자 쉐마의 노랫말을 가르쳤다. 예수님도 십중팔구 어린 시절 요셉의 무릎 위에서 쉐마를 배웠을 것이다. 이 몇 줄의 노랫말은 예수 탄생 수 세기 전부터 유대인 기도 생활이 중심축이었다. 율법학자로부터 으뜸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예수님은 쉐마를 인용하심으로 답변을 시작하셨다. 예수님의 신앙생활에서도 쉐마는 중심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12:28-31

왜 예수님은 "하나님은 하나이시다"라는 한 줄을 인용하셨을까? 이것이 쉐마의 오프닝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따라오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인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이다. 유대 민족은 수천 년간 매일 밤낮으로 쉐마를 낭송하며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랍비 예수의 말씀으로 살다


# 때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수수께끼와 같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왜 예수님은 '나쁜 눈'에 대해 경고하셨을까? 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셨을까?" 예수님이 사용하셨던 유대 관용구와 그 이면의 발상을 알게 되면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생생하고 실질적인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여러 주제 중 남 판단하기, 혀 놀림 조심하기 등은 수 세기에 걸쳐 유대 사상에서 크게 강조되온 것이다. 우리는 유대인의 사유를 통해 랍비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데 필요한 놀라운 지혜를 얻을 수 있다.


#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의 진의를 알 수 있을까? 예수님은 뉴에이지 스승이나 21세기를 살아가는 목회자가 아니라 유대인 랍비였다는 사실에 답이 있다. 히브리어에는 '눈'을 사용하여 남을 대하는 자세를 설명하는 관용구가 많이 있다. '좋은 눈'과 '나쁜 눈'을 비교하실 때 예수님은 아마도 성경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히브리 언어에서 사용되는 두 관용구를 비교하셨을 것이다. '좋은 눈'아인 토바 을 가졌다는 것은 남의 필요를 살피고 가난한 자에게 넉넉하게 베푼다는 뜻이다. 그러나 '나쁜 눈'아인 라아 을 가졌다는 것은 욕심이 많고 자기중심적이며 주변의 궁핍을 외면한다는 뜻이다. '좋은 눈'이나 '나쁜 눈'을 가졌다는 발상은 히브리어의 '보다'가 남을 대하는 태도와 반응까지 아우르는 확장적 개념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히브리어 동사는 정신적 활동을 거기서 예상되는 물리적 결과와 결부시킨다. (중략) 예수님의 말씀을 관용구로 읽으면 그 의미가 완벽하게 통한다. 만일 당신이 너그러운 사람이라면 평생에 그 너그러움이 드러날 것이고, 만약 이기적인 사람이라면 이기심은 당신의 영혼 자체를 좀 먹을 것이다.


# 예수님의 히브리어 이름은 '예슈아'다. 예수님의 유대적 맥락을 연구하는 많은 사람은 예수님의 유대적 삶과 현실에 관한 민감성을 유지하고자 예슈아라는 이름을 선호한다....천사는 요셉에게 장차 아들을 예슈아로 부르라고 했는데, 그분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예슈아는 '여호수아'의 줄임태이고 문자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구원'이다. 예수님의 이름이 원래는 '예슈아'였음을 알면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그 기막힌 뜻을 더 의식할 수 있다.


# 유대 논리와 서구 논리가 갈라지는 또 다른 분기점은 홀로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이해하신다는 전제다. 유대적 사고는 서구적, 기독교적 사고보다 훨씬 더 부대낌 없이 인간의 한계를 인정한다. 마빈 윌슨은 말한다. "히브리인은 자신은 모든 답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았다. 히브리인은 수수께끼 같은 하나님의 진리나 우주적 난제에 대해 과도하게 구조화하거나 강제적으로 통일성을 부여하는 방식을 거부했다. 히브리적 사고에서는 역설의 양편에서 가르치는 진리들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즉 신비와 모순처럼 보이는 것은 종종 신성의 징표임을 인정한다."


# 유대 사상이 균형을 추구하는 또 다른 방식은 율법에 대한 접근법에 있다. 그리스도인은 전통적으로 모든 계명이 동등한 중요성을 가진다고 이해했다. 그러나 예수 시대 이전부터 랍비들은 율법을 '저울질'하여 (두 율법이 상충하는 경우) 무게가 많이 나가는 법을 우선시하는 접근법을 취했다. 가령 팔 일째 할례를 하라는 계명은 안식일 계명에 우선했다. 랍비들은 이 법들을 가벼운 것, '카알'과 무거운 것 '하무르'로 설명했다. 이는 어떤 법은 따르고 어떤 법은 멋대로 무시해도 좋다는 게 아니라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법대로 살려는 노력에서 연유한 접근법이다.


# 성경에서 도출한 특정 원리들이 서로 상대적인 율법들 사이에서 질서를 부여하는 기준이 되었다. 많은 랍비는 율법의 우열을 어떻게 가릴까를 놓고 집중적으로 논쟁했다. 가령 '생명 보존'을 뜻하는 '피쿠아트 네페쉬'란 원리가 있다. 현자들은 토라가 어떤 법적 규범보다 인간 생명의 독보적 중요성을 인정한다는 점을 인식했다. 토라 자체도 율법은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 주어졌다고 말한다. 유대 사상가들은 인간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살인, 우상숭배, 음행을 제외한) 모든 율법을 뒷전으로 놓을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랍비 예수와 함께 공부하는 성경


# 유대인은 성경을 친밀하게 알았고, 예배의 한 형태로 성경을 공부했던 민족이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 말씀을 가르치셨다. 그들은 성경에서 끝없이 새로운 통찰을 얻으면서도 하나님이 아직 계시하지 않은 답이 있음을 알았다. 예수님도 율법서와 예언서와 성문서라는 원천에서 지혜를 끌어올리셨다. 예수님의 유대적인 시각을 통해 우린 처음부터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열망을 품은 하늘 아버지를 본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이 어떤 부르심을 따라 살아야 하는 하는지 그리고 대속자로서 자신의 사명은 무엇인지를 성경에서 확인하셨다.


# 예수님을 더 깊이 배워갈수록 성경을 읽는 데에도 내면의 '양안 시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가 신약에서 발견한 그리스도의 이미지는 구약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것과 겹쳐지고 뒤섞여야 한다. 예수님도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선포하지 않으셨던가? 그러나 당신이 성장기에 내가 읽었던 방식으로 성경을 읽었다면 당신의 '내면의 눈'은 예수님과 하나님을 고집스레 분리해 놓았을 수도 있다. 죄인을 향한 그리스도의 긍휼이 구약에서 하나님이 내린 혹독한 심판과 완전히 어긋난다고 보는가? 그렇다면 다인의 생각이 예수님과 천부에 관한 통합적 인식을 거부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엄격함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분리하려는 습성은 기독교 역사 내내 계속되었다.


# 유대 사상가들 역시 우리와 똑같이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 사이의 긴장감을 놓고 고민했다. 이 긴장을 사유하는 방법 하나는 비유에 담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도 유대 사상가들은 전형적인 '양손' 접근법을 사용했다. 〔이것은 장인에게 지극히 우아하고 진귀한 잔을 만들라고 지시한 왕에 비할 수 있다. 왕은 말했다. "내가 만일 뜨거운 액체를 여기 붓는다면 이 잔이 터져버릴 것이고, 얼음처럼 찬 액체를 붓는다면 금이 갈 것이다!" 왕은 어떻게 했을까? 그는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을 섞어 잔에 부었고 잔은 멀쩡하게 보존되었다. 마찬가지고 칭송받기에 합당하신 거룩한 분이 말씀하셨다. "내가 만일 자비라는 토대에 근거해서만 세상을 창조한다면 세상이 죄로 뒤덮일 것이다. 그리고 오직 공의라는 속성만으로 세상을 창조한다면 어찌 세상이 버틸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자비와 공의라는 속성 둘 다를 가지고 세상을 창조할 것이다. 부디 세상이 오래 버티기를!Genesis Rabbah 2;15  이 이야기는 신학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어떻게 해야 공의와 긍휼을 하나님 안에 공존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자비와 공의 둘 다 있어야 하나님이 창조세계를 통치하시면서도 세상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랍비들은 하나님의 모든 생각을 완벽하게 체계화할 수 있다고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행동을 설명하려고 했다.


#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이 구절 안에 들어 있는 심오한 사상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그리고 예수의 제자로서 살아가도록 어떻게 조명되는가? 바울은 우리가 부패한 옛사람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엡4:24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헤세드타인에 대한 긍휼과 충성을 뜻한다를 내보이는 '하나님의 모방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로 보면 그리스도께서 고대 랍비식 양육법으로 제자들을 양육하셨던 것이 합당하게 여겨진다. 제자들은 날마다 예수님과 동행하며 주님이 성경에 접근하시는 방식을 배웠다. 더 중요한 점은 예수님이 자기 가르침대로 사는 모습을 그들이 곁에서 지켜보았다는 사실에 있다. 제자들은 랍비의 길로 걷기 위해 그분을 본받으려고 노력했고, 밖으로 나가 다른 이에게도 그 길을 따라 살도록 훈련했다.


# 유대의 아이들은 아주 어릴 적부터 성경을 배우기 시작한다. 바울은 디모데가 어린아이 때부터 성경을 알았다딤후3:15고 했다. 유대인들은 십 대 소년이 되면 성경 본문의 상당 부분을 암송하며, 십 대 이후에는 토라를 해석한 구전 전승을 배운다. 공동체 전체를 남녀 불문하고 매주 회당에 모여 큰 소리로 토라를 낭독하는 것을 들었다. 유대인은 2천 년 넘게 전 세계적으로 성경을 공부하고 매주 모든 사람이 토라의 같은 본문을 묵상한다. 예수님은 매주 회당에서 토라를 공부하며 성장하셨고, 열정적이던 예루살렘 초대 교회 역시 그랬다. 사도행전 15장 21절에서 야고보는 이 관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수 세기에 걸쳐 이어온 종교적 대화는 여러 대륙에 뿔뿔이 흩어져 살던 유대인에게 일체감을 부여했고 선조들과의 연결고리가 되었다. 유대인은 매년 새해가 시작된 후 가을에 '토라의 기쁨'이라는 심하트 토라Simchat Torah 축제를 열고 신명기부터 창세기까지 거꾸로 두루마리를 감는다. 또다시 새로운 공부가 시작되는 것이다.


# 랍비들은 성경 본문의 각 줄은 '일흔 가지 얼굴을 한 보석'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보석을 "돌리고, 돌리고 또 돌려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무궁무진한 방식으로 우리 삶에 말을 걸어오는 능력이 있다. 아브라함 헤셀은 이를 이렇게 요약했다. "논란의 여지없이, 확고 불변하게, 성경은 결코 시간에 마모되지 않으며, 시대를 넘나들며, 마치 지상에 거하는 모든 영혼의 소유인 것처럼 만인에게 자신을 스스럼없이 내어준다. 성경은 모든 언어로 모든 시대 속에서 말을 건넨다. 비록 성경의 언어가 평범하고 그 관용구는 투명해 보일지라도 미처 보지 못한 의미와 꿈도 꾸지 못한 암시가 줄기차게 성경에서 터져 나온다. 2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읽고 또 연구해도 성경의 의미를 다 발굴하지 못했다. 오늘도 성경은 한 번도 누군가의 손길이나 눈길이 닿지 않은 것처럼, 우리가 읽기를 시작하지도 않은 것처럼 그렇게 존재한다. 성경의 영성은 한 세대가 짊어지기에는 너무 과하다. 성경의 언어는 우리가 흡수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계시한다."God in Search of Man:A philopophy of Judaism


# 욥의 친구들처럼 '하나님에 대한 앎' 즉 다앗 엘로임에 대한 히브리적 이해가 없는 오늘날의 서구 그리스도인 역시 종종 비슷한(욥의 친구들처럼) 실수를 한다.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길 원하는 서구인은 성경을 펼쳐들고 하나님의 본질을 설명하는 신학을 세운다. 우리는 이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어에서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아내가 남편을 알듯 경험과 관계를 통해 친밀한 사이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앎'은 헌신과 충성을 전제로 하며 때로는 성적인 부분까지 내포한 친밀함을 뜻한다. (중략) 이 히브리적 의미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이해하게 되면 어떻게 욥이 하나님께 비난을 투척하는데도 하나님이 "욥의 말이 옳다"고 하셨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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